생리불순, 희발월경 숨은 원인
여성은 초경부터 폐경까지 평생 대략 400번 안팎의 생리를 경험한다. 불과 40~50년 전만 하더라도 여러 차례 임신하고, 출산 후 수유로 인한 무월경 기간이 길어 평생 100회 이하의 생리를 하는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출산율이 낮은 시대에는 사정이 다르다. 임신과 수유로 생리가 멈추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많은 여성이 거의 쉬지 않고 수백 번에 걸쳐 배란과 생리의 리듬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여성에게 생리는 단순한 출혈이 아니다. 난자가 배란됐다는 생리적 신호, 다시 말해 수태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표시다. 문제는 최근 20~30대 여성 100명 중 3.8~4명이 무월경, 희발월경(주기가 35일부터 6개월 이내인 월경) 등 생리불순을 호소하는 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15~49세 가임기 여성은 약 19억 명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약 10%, 대략 2억 명 안팎의 여성이 ‘희발월경’을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구촌에 사는 여성 10명 중 한 명은 배란 패턴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점점 늘어나는 생리불순과 희발월경, 무월경의 원인과 치료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고자 인천 구월동에 있는 이경훈 서울아이비에프여성의원 원장을 찾았다. 이 원장은 “공항 주변에 자리한 난임 병원이어서 그런지 생리불순을 호소하는 환자가 유독 많이 찾아온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스트레스 많고 불규칙한 생활은 이제 그만
“생리는 여성 몸의 시계와 같다. 시간이 느려진 시계를 방치하면 고장이 나듯 생리불순도 마찬가지다. 생리불순의 가장 큰 원인으로 다낭성난소증후군을 꼽지만, 최근에는 긴장성 스트레스가 그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직장 스트레스가 심하면 호르몬 리듬까지 깨질 수 있다.”
낮과 밤이 바뀌는 일이 흔하고 근로시간이 불규칙한 직업군에서 생리불순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그 이유가 뭔가.
“인간의 몸은 생체시계에 맞춰 호르몬을 분비한다. 몸속에는 24시간을 기준으로 움직이는 리듬이 이미 프로그램처럼 새겨져 있다. 그런데 낮과 밤의 리듬이 계속 바뀌면 숙면을 돕는 멜라토닌 분비가 잘 안 돼 수면 리듬이 깨지고 스트레스호르몬이 많이 나온다. 생식호르몬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쳐 배란이 늦어지거나 멈추기도 하며, 임신도 방해한다.”
2014년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남은 여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1년 가까이 생리를 하지 않아 치료를 받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사고 충격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생리는 자궁이 아니라 뇌에서 시작된다. 강한 공포와 충격을 경험하면 뇌의 시상하부가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다. 시상하부가 분비하는 ‘성선자극호르몬 방출호르몬(GnRH)’이 줄어들면 뇌하수체의 황체형성호르몬(LH)과 난포자극호르몬(FSH)’ 분비도 감소하고, 결국 난소의 배란이 멈춘다. 스트레스가 오래 지속되면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호르몬이 계속 분비되면서 생식호르몬 축(시상하부-뇌하수체-난소)이 흔들린다. 에너지를 빠르게 보충하라는 신호를 자꾸 보내니까 뇌는 자연스럽게 당분과 지방이 많은 음식을 갈구하게 된다. 그러다가 체중까지 늘어나면 악순환이 시작되는 거다.”
전쟁 중인 이란과 이스라엘에 생리가 끊긴 여성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전쟁을 겪은 할머니들에게서 ‘피난을 다닐 때 달거리가 몇 달씩 끊겼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인간의 몸은 위기 상황이 닥치면 우선순위를 바꾼다. 생존이 더 급하다고 판단되면 번식 기능을 잠시 멈추기도 한다.
실제로 생사를 오가는 큰 사건이나 사고를 겪은 여성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자율신경계와 내분비계 균형이 깨져 ‘무월경’이 반년 이상 이어지기도 한다. 생리주기의 정상 범위는 보통 25일에서 35일 사이다. 만약 21일보다 짧으면 주기가 너무 빠른 것이고, 38일 이상이면 주기가 길다고 본다.”
생리불순과 피임약에 대한 오해와 진실
희발월경, 생리불순, 무월경의 원인인 다낭성난소증후군에 대해 알고 싶다.
“다낭성난소증후군은 성호르몬을 조절하는 뇌와 난소 사이의 균형이 깨지면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슐린 저항성이 발생하고 난소에서 남성호르몬(안드로겐)이 과도하게 만들어지면 이 균형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면 난포가 충분히 자라지 못해 배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배란되지 못한 작은 난포들이 난소 주변에 여러 개 남게 되는데, 초음파로 보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린 게 보인다. 제때 배란이 안 돼 생리불순이 생기고, 심하면 무월경이 되기도 한다 이를 방치하면 대사 장애, 고지혈증, 당뇨, 비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낭성난소증후군에 의한 무월경이나 희발월경 치료제로 피임약을 처방한다고 들었다.
“이름이 피임약일 뿐 피임 효과가 있는 혼합 호르몬제로 보면 된다. 매달 생식 리듬과 생리주기를 규칙적으로 만들어서 자궁내막을 보호하고 호르몬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 호르몬제를 끊으면 다시 생리불순이나 무월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임신을 원할 때까지는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 매일 약을 챙겨 먹기 어려운 항공사 승무원이라면 한 달에 며칠만 호르몬제 복용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 방법은 생리주기를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피임 효과는 없다.”
피임약은 약국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호르몬제가 아닌가.
“실제 진료 장에서는 환자의 상태와 목적에 따라 약을 선택한다. 단순 피임 목적이 아니라 호르몬 조절이나 생리주기 관리가 필요한 경우라면 산부인과에서 상담을 받고 처방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중에서 파는 피임약은 프로게스테론 성분의 종류에 따라 보통 1세대, 2세대, 3세대, 4세대로 구분된다. 대부분은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 함께 들어 있는 혼합형 호르몬제다. 1세대부터 3세대까지의 피임약(머시론, 센스데이, 센스리베 등)은 약국에서 비교적 쉽게 구입할 수 있지만, 4세대 피임약은 보통 산부인과나 병의원에서 처방받아야 한다.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적다.”
생식호르몬 외에도 배란을 방해하거나 생리불순, 난임을 유발하는 호르몬이 있나.
“갑상샘자극호르몬(TSH)이 대표적이다. 이 호르몬 수치를 잘 관리해야 한다. 갑상샘 기능이 저하되거나 항진되면 시상하부-뇌하수체-난소 축의 생식 리듬이 흔들리면서 배란이 불규칙해질 수 있다. 또 하나는 유즙분비호르몬인 프로락틴이다. 프로락틴 수치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생리불순이 나타나고, 심한 경우 무배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뇌가 ‘지금은 수유 중인 상태’라고 인식해 배란 신호 자체를 억제하기도 한다. 다행히 이런 경우는 원인을 찾아 약물 치료를 잘하면 대부분 회복된다.”
호르몬 불균형의 원인은 무엇인가
“몸 전체의 균형이 흔들릴 정도의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다. 체중이 짧은 기간에 크게 변하는 경우가 대표적 사례다. 급격한 다이어트나 저체중은 에너지 부족 상태를 만들고, 반대로 비만은 인슐린저항성을 높여 난소에서 남성호르몬 분비를 증가시킨다. 두 경우 모두 배란을 방해할 수 있다. 불규칙한 수면과 생활 리듬도 문제다. 밤낮이 뒤바뀌거나 수면 시간이 부족하면 멜라토닌과 스트레스호르몬의 균형이 깨지고, 생식호르몬 분비에도 악영향을 끼쳐 배란의 리듬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최근에는 우주 환경이 인간의 생식호르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급격한 중력 변화, 우주방사선 노출, 생체리듬 교란이 일어나는 환경에서 장기간 체류하는 우주인의 호르몬이 어떻게 변하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주여행 도중 초기 임신이 확인되는 경우 어떤 산과적 대응이 필요한지에 대한 의학적 기준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 항공 승무원들이 경험 하는 생체리듬 교란과 호르몬 불균형, 일부 산과적 합병증이 장기 체류 우주비행사에게도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난임 치료의 본질은 '유명세' 아닌 '타이밍'
생리불순이 난임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가.
“규칙적인 수면, 적절한 체중 유지, 스트레스 관리를 꾸준히 하는 것이 생식호르몬의 균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생리불순을 이미 겪고 있다면 혼자 힘으로 판단하지 말고 가까운 난임병원을 찾아 기본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
생리가 불규칙할 때부터 검사를 시작하면 난임을 예방할 수 있다. 난임 치료의 첫걸음은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이다. 저마다 몸 상태와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믿음직한 병원을 선택해야 한다.”
난임 환자들은 유명한 의사, 대형 병원을 선호하는 것 같다.
“이해한다. 하지만 난인 치료의 본질은 타이밍이다. 생리과 배란주기에 맞춰 며칠 간격으로 초음파을 보러 가야 하고, 호르몬 변화를 확인하며 적절한 순간에 인공수정이나 체외수정(IVF)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난임 치료는 얼마나 유명한 병원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꾸준히 다닐 수 있는 믿음직한 병원이냐가 중요하다.”
병원에 정자은행도 보유하고 있다고 들었다. 한국 남성 정자 기증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던데?
“정말 힘들다. 어렵게 기증자를 만나도 정자가 확보되지 않을 때는 기운이 빠진다. 최종적으로 정자 기증이 확정되려면 여러 단계의 검사를 거쳐야 한다. 기증 예비자들은 기증 전에 건강검진을 치밀하게 한다. 감염질환(에이즈, B형 간염, C형 간염, 매독, HTLV, 클라미디아, 임질 등)과 유전질환을 모두 검사한다. 또 정자를 채취해 냉동 보관한 뒤 약 6개월 후 다시 감염 질환을 검사한다. 잠복 감염까지 확인하는 재검사에서도 문제가 없을 때만 최종적으로 정자 기능이 결정된다. 어렵지만 좋은 기증자를 확보하기 위한 노하우를 조금씩 쌓아가고 있다.